나라를 바로 세우는 길인가
우리말 살리는 겨레 모임 공동 대표 : 김 정섭
이번에 "전국 한자 교육 추진 총 연합회"에서 역대 교육부 장관 몇몇의 서명을
빌려 대통령께 초등학교에서 한자 교육을 실시하라고 건의했다 한다. 초등학생
에게 한문 글자를 가르치자는 말은 해를 걸러 도지는 병과 같아서 아무 대꾸할
값어치도 없는 일이지만, 이 터무니없는 일에 역대 교육부 장관들이 이름을 올
렸다면 그 분들에게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우리 교육은 막다른 고비에 몰려 있다. 학교가 뿌리째 흔들리고 교실이
쑥대밭이 되었다. 학생, 교사, 학부모, 모든 국민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다. 몇몇
사람의 책임은 아니겠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이 역대 교육부 장관이다. 이들이야말로 우리 교육을 이 꼴로 만든 사람
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책임을 묻고 따지기에 앞서 스스로 몸을 낮추고 엎드려 있든지,
아니면 지난날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고 이제라도 교육을 바로 세우는 일에 남은
목숨을 바쳐 죄를 빌어도 모자라는 판에 또 다시 나라 망칠 짓을 하는 꼴을 보
니 이런 교육부 장관이 있었기에 우리 교육이 이 꼴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 같다.
요즘, 우리 모둠살이에서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뿐, 거짓말을 한 적은 없다."
는 말이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른바, 나라를 다스리고 이끈다는 무리들이 스
스로 한 거짓말을 얼버무리는 말이다. 좀 배웠다는 패거리들이 하는 꼬락서니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바로, 초등학생에게 한문 글자를 가르쳐야 한다고 떠드
는 치들이 하는 말도 하나같이 거짓말이다.
거짓말, 하나 ; 한문 글자를 가르치지 않으면
전통 문화가 단절되고 파멸한다.
우리 전통 문화 가운데 한 가닥인 한문 고전을 읽으려면 마땅히 한문을 알아
야 한다. 하지만, 모든 겨레가 한문 글자를 배워서 한문 고전을 읽어야 전통 문
화가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전통 문화와 고전을 연구하
는 사람들이 깊이 공부하여 우리말로 제대로 풀이해서 널리 알리는 것이 전통
문화를 잇는 바른 길이다.
거짓말, 둘 ; 기본 한자 1500 자만 알면
주요 고전의 97.72 %를 이해할 수 있다.
도올 김용옥은 "논어 이야기"에서 중국과 우리나라의 옛 학자들이 잘못 풀
이한 것을 하나하나 가려내어 새롭게 풀이하였고, 이경숙은 "노자를 웃긴 남
자"에서 도올 또한 잘못 풀이하고 있다고 하여 눈길을 끌었다. 두 사람 다
한문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분이다. 그런데도 논어의 뜻풀이가 제가
끔 다르다.
이렇게 한문은 본디 어렵고 힘들게 되어 있는 학문이다. "동양 고전"이나 "
우리 고전"은 한문 글자를 안다고 쉽게 읽고 풀이할 수 있는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중국의 지식인들조차 "논어" 풀이는 땅띔도 못한다는
데 하물며 우리가 한문 글자 1500 자를 배워서 "한문 고전을 읽고 이해한
다"는 것은 대꾸할 값어치도 없다.
거짓말, 셋 ; 21 세기는 동북아 시대이며 한자 문화권 시대다.
21 세기는 동북아 시대가 될지 모르지만, 한자 문화권 시대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말 문화권"은 있으되 "글자 문화권"은 없기 때문이다. 영어
를 쓰는 여러 나라를 묶어서 "영어 문화권"이라 하고, 유럽에 있는 잉글랜
드, 도이칠란트 따위 여러 나라를 묶어서 "유럽 문화권"이라 하지만, 로마
글자를 쓰는 나라를 몰밀어 "로마 글자 문화권"이라 하지 않는다.
한국, 중국, 일본은 자리잡은 곳으로 보아 "동북아 문화권"이라 할 수 있
지만, 한문 글자를 쓴다고 해서 "한자 문화권"이라 할 수 없다. 말이 다르
기 때문이다. "지리적으로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한국이 한글 전용을
고집하는 것은 스스로 고립을 자초할 뿐"이라 하지만, 그 말이 참말이고
정말 그 일이 걱정이라면 우리말을 버리고 중국말과 일본말을 나라말로
써야 할 것이다. 한문 글자를 쓴다 해도 두 나라 말글을 알 수 없기 때문
이다.
중국에선 월요일을 "성기 일(星期 一)", 버스를 "공공기차(公共汽車)", 사
장(社長)을 "경리(經理)"라 하고, 일본에선 어린이를 "자공(子供)", 농삿꾼을
"백성"이라 한다. 읽는 소리 또한 다 다르다.
한문 글자를 모른다고 우리나라가 따돌리는 일이 생길 까닭이 없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정작 우리가 걱정해야 할 일은 "외톨이가 되면
어쩌나" 하는 것이 아니라 얼빠진 겨레로 남의 문화 종살이를 하느냐, 아
니면 떳떳하게 나라 주인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거짓말, 넷 ; 우리말은 구조 자체가
70 % 이상의 한자어로 구성돼 있다.
"일본어 사전"을 그대로 베낀 어느 국어 사전에 올림말로 실린 낱말 수
에 바탕을 두고 하는 말인데 그 사전에 있는 한자말을 보면 일본에서만
쓰는 일본 한자말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 이름, 땅이름, 한자말로 옮긴
서양 나라 이름과 우리 말글살이에서 평생에 한 번 쓰기는커녕 구경도
못할 옛 중국과 우리 한문책에 실린 한자말이 수두룩하다.
또, 뜻이 같은 한자말이 대여섯 가지에서 많게는 이백 가지씩 실린 것도
있다. 민들레의 한자말 이름은 포공영 따위 여섯 낱말이 실려 있고 아버
지를 가리키는 말은 부친 따위 63 가지, 편지를 나타내는 서간, 서찰 따
위 198 낱말이 실려 있다. 그러니 한자말이 많아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날살이(일상생활)에서 쓰는 한자말은 거의 다 겨레말로 갈음
할 수 있고, 겨레말이 없는 한자말은 1 % 남직하다. 이런 한자말은 들온
말로 받아들여 우리말로 삼고 한글로 쓰면 그만이다. 모든 나라가 다 그
렇게 한다.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70 %가 한자말이라는 사람이나 신문
과 잡지에 실린, 한글로 쓴 우리 글을 읽고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학 교
수는 이제라도 다시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우리말 공부를 처음부터 시작할
일이다.
거짓말, 다섯 : "구제역, 환란, 오니처리장"은
한문글자로 써야 뜻을 알 수 있다.
구제역(口蹄疫)은 "입 구, 굽 제, 돌림병 역", 환란(換亂)은 "바꿀 환, 어
지러울 란" 오니처리장(汚泥處理場)은 "더러울 오, 진흙 니, 곳 처, 다스
릴 리, 마당 장" 이다. 한문글자를 안다고 이 낱말 뜻을 알기는 쉽지 않
다. 우리말 "해감"을 모르니 한자말 "오니"를 쓰고 "오니"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으니까 한문 글자로 써서 글자 풀이하여 뜻을 대충 짐작하겠다
는 말이겠지만 글자 풀이로 뜻을 알 수 있는 한자말은 그리 많지 않다.
"사회(社會)와 회사(會社)"를 보기로 들면, "사(社)"는 "땅귀신 사, 제사지
낼 사, 단체 사, 사일 사"이고 "회(會)"는 "모일 회, 모을 회, 모임 회, 반
드시 회, 마침 회, 기회 회, 셈 회, 깨달을 회, 그림 회"다. 낱말 뜻을 익
히지 않고 한문글자의 뜻으로 "사회"와 "회사"의 뜻을 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말이란 본디 귀로 소리를 듣고 뜻을 알 수 있어야 한다. 말소리를 듣고
뜻을 알 수 없는 말은 우리말이 아니거나 소리일 뿐이다. 한문 글자를 보
고 뜻을 알 수 있다 하더라도 말할 때마다 글지를 써 보일 수 없는 노릇
이고 그렇게 해서 될 일도 아니다. 글자를 보아야 뜻을 알 수 있는 한자
말은 마땅히 말소리를 듣고 뜻을 알 수 있는 우리말로 바꾸어야 한다.
사람의 생각과 느낌과 어떤 뜻을 담은 사람의 목소리를 "말(청각언어 =
음성언어)"이라 하고 이 말소리를 한글이나 로마 글자나 한문 글자 따위
글자로 적은 글월을 "글(시각언어 = 문자언어)"이라 한다. 따라서, 말이
없는 글은 없다. 한자말도 입으로 소리를 내면 "청각 언어"고 겨레말도
한글로 쓰면 "시각 언어"다. 글자를 보아야 뜻을 아는 한자말을 "시각 언
어"라 하는 것은 말과 글이 무엇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거나 사람들을 속
이려는 잔꾀다. 중국이나 일본에는 글자를 보아야만 뜻을 알 수 있는 한
자말은 쓰지도 않고 있지도 않다.
거짓말, 여섯 : 한문 글자를 모르기 때문에
일본 학술용어를 직수입해서 쓴다.
학술용어를 일본에서 직수입해서 쓴 사람은 한문 글자에 얼이 빠진 얼치
기 학자들이고 일본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조선왜놈들이다. "나라말, 말본,
이름씨, 물음표"를 일본 학술용어인 "국어, 문법, 명사, 의문 부호"로 바꾼
사람도 그들이고 "세모꼴, 덧셈 뺄셈"을 "삼각형, 가감산"으로, "뼈마디,
살갗, 피"를 "관절, 피부, 혈액"으로, "꽃, 꽃가루"를 " 화훼, 화분"으로 쓰는
치도 한문 글자를 쓰자고 떠벌리는 인간들이지 한문 글자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아니다. 한문 글자를 몰라서 일본 학술용어를 직수입해서 쓴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한문 글자를 가르쳐서 "학술용어나 신조어"에 대처하자"고 하는데, 우스갯
소리지만 저네들은 무얼하고 초등학생에게 한문 글자를 가르쳐 학술용어와
신조어를 한자말로 만들게 하자는 말인가? 학술용어나 신조어는 꼭 한자말
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바탕이 잘못되었다. 우리말로 학술용어를 만들어
야 한다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적이 있는지 알고 싶다.
요즘은 학술용어도 한자말에서 서양말로 바뀌고 있는데, 학술용어가 한자
말이나 서양말에 얽매어 있고서는 우리 학문은 앞날이 없다. 일본에서 직수
입해 쓰는 학술용어를 모조리 우리말 학술용어로 바꿀 때 비로소 참다운 우
리 학문이 꽃필 것이다. 모든 학자가 맡은 학문에서 일본 학술용어를 우리말
학술용어로 고치는 데 온갖 힘을 기울여야 할 오늘인데 오히려 한문 글자를
가르쳐서 한자말 "학술용어"를 만들자는 게 될 법이나 한 소리인가?
거짓말, 일곱 : 초등학교에서 한문 글자를 가르치면
우리말의 기초 실력을 기를 수 있다.
한문 글자란 덮어놓고 외어야 하는 "모자란 글자"다. 쓰는 것도 외어야 하
고, 읽는 소리도 외어야 하고, 뜻도 외어야 한다. 그렇다고, 배우기 어려우니
가르치지 말고 쓰지도 말자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아무리 어려워도 쓸모가
있다면 가르쳐야 하고 쓸데가 있다면 배워야 한다. 하지만, 한문 글자는 우리
말글살이에 아무 쓸모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우리말을 담을
수 없는 글자이고 우리말을 병들게 하는 글자이기 때문이다.
또, 중국말이나 일본말을 배우는 데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와 중
국과 일본에서 쓰는 한문 글자가 서로 다르고, 읽는 소리도 다르고, 낱말이
다르고 말소리가 다르고 말본이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말을 쓰면서 이웃
나라와 사이 좋게 어울려 지내자는 뜻이라면 차라리 한문 글자가 아니라 중
국말과 일본말을 가르치고 쓰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동양 고전이나 우리 고전을 연구할 사람은 한문 글자가 아니라 한문을 배
워야 하고, 한문은 중학교에서 가르쳐도 늦지 않다. 그런데, 초등학교에서 한
문 글자를 가르치자는 뜻은 전통 문화나 고전을 이어받자는 것도 아니고,
중국말이나 일본말을 배우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것을 핑계삼아 우리 말글살이를 한자말, 한문 글자로 하자는 데 있
다. 한문 글자가 우리말의 기초라는 말이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자말
에 밀려난 겨레말도 많지만 이제는 들어 내놓고 우리말을 죽여 없애자는
속셈이다. 우리말이 죽으면 우리 겨레도 죽고, 겨레가 죽으면 저네들도 함
께 죽는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짓일까?
마무리: 이제는 우리말과 우리 글을 바로 알고
바로 쓰기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나라를 되찾은 지 예순 해가 가까워 오는 지금까지 한문 글자를 섞어 쓰자
는 사람들은 끈질기게 억지를 부려 왔고 그러는 동안에 우리 말글은 병들
고 죽어 간다. 한문 글자를 쓰느냐, 한글만 쓰느냐 하는 것은 생각이 같고
다른 문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인데 어느 쪽이 옳은 지는 이미
판가름난 지 오래다. 아무리 무엇에 씌었다고 해도 이제는 제 정신을 차려
야 할 터인데 아직도 거짓말로 사람들을 속이려 하니 안쓰럽고 답답하다.
우리는 마땅히 우리말과 우리 글자로 살아가야 한다. 중국 바람이 불면 중
국을 따르고, 일본 바람이 불면 일본을 따르고, 서양 바람이 불면 다시 서양
을 붙좇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배달겨레, 한국 사람으로서 줏대를 세우
고 우리말과 우리 글자로 우리 문화를 일구어 나가야 한다. 우리말 우리 글
을 바로 알고 바로 써야 한다. 이것만이 우리가 참되고 우리답게 사는 바른
길이다. 한문 글자를 가르치자는 분들은 이제까지 해 온 일이 얼마나 큰 잘
못인지 깊이 깨닫고 다시는 나라 망칠 짓거리를 되풀이하지 않기 바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