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모아쓰기와 풀어쓰기에 대하여
작성자 천영수
등록일2003.01.13
조회수2307
최현배 선생님이 풀어쓰기를 주장하며 풀어쓰기 시안(試案)까지 내놓은 일이 있었다. (여기서 풀어쓰기란 한글을 쓸 때 자소(字素)를 알파벳처럼 일렬로 풀어놓는 방식을 말하고, 모아쓰기는 현재방식처럼 한 음절의 초성, 중성, 종성을 모두 모아서 네모난 칸 안에 꽉 차게 집어넣는 방식을 말하는데, 최현배 선생님이 지은 이름인 듯하다) 선배님이 국어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지만, 이 제안이 깨끗이 무시되었음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현재의 표기방식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황인데 표기습관을 바꿀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생님의 시안내용은 매우 징그러웠다. 알파벳과 너무 비슷했다. 대소문자 구분, 인쇄체와 필기체의 구분이 그랬고 필기체의 흘림 모양도 그랬다. 그리고 세종대왕님의 취지를 너무 존중하여 24개의 자소만 사용하였기 때문에 풀어 쓴 결과가 너무 긴 공간을 차지하였다. 예컨대, "꽝"자는 5개의 자소로 표기되어 모아쓰기에 비해 2.5배의 길이를 차지하였다. 채택되지 않아 아까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한편 아쉬움도 있다. 모아쓰기의 폐해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매우 쉽다고 생각되는 현재의 표기방식에 대해 무슨 흠이 있어서 잊혀진 표기방식을 운운한단 말인가? 모아쓰기의 단점을 살펴본다.

1. 풀어쓰기에 비해 모아쓰기에서는 맞춤법이 더 복잡하다.
풀어쓰기에서는 "먹으니"와 "머그니"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고민이 없다. 맞춤법을 통달한 후에는 이러한 선택문제가 별로 어렵지 않지만, 초등학교시절 받아쓰기 시간에 어려움을 주는 항목이다. 그리고 "오막사리"인지 "오막살이"인지 건별로 구분하여 외어야 하는 어휘가 생기게 하는 것이 모아쓰기이다. ("오막살다"라는 말이 없는데 왜 "오막살이"이어야 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동일한 논리를 적용하려면 "조개무지"라 하지 말고 "조개묻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저 외울 뿐이다. 외어야 할 것이 많은 규칙은 나쁘다.)

2. 모아쓰기는 비효율적이다.
모아쓰기에서는 초성이 없는 음절의 경우 글자모양을 좋게 하기 위하여 초성의 자리에 음가 없는 "이응"을 집어넣는다. 그런데 우리말의 문장에서 초성이 없는 음절은 천체 음절수의 10%를 훨씬 넘는다. 일일이 세어 보지는 못했지만, 국어사전에서 모음으로 시작하는 단어가 10%를 훨씬 넘는 지면을 차지할 뿐 아니라 사용빈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 토씨에서 -이, -에게, -으로, -을 등과 같이 모음으로 시작하는 음절이 많고 동사의 어미변화에서 "으"가 자주 사용되기 때문에 이렇게 추론할 수 있다. (본 글의 제목에서는 13글자 중에 5글자가 모음으로 시작하는 음절이다.) 이 불필요한 "이응"의 삽입은 필기할 때나 타이핑할 때 추가적인 노동을 요한다. 기록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꾀쟁이 네티즌들이 소리나는 대로 표기하는 습관은 모음 없는 음절에 앞 음절의 종성을 옮겨 적음으로써 타수를 줄이는 효과가 있다. 빠른 입력은 소리대로 쓰는 습관으로 유도하는 동기의 일부라고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풀어쓰기를 할 경우 많은 경우에는 "으("이응"을 뺀 "으"를 의미함)"를 생략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생략하여도 괜찮은 것(redundancy)은 생략하는 것이 효율이다. 예컨데, 풀어쓰기에서는 "그러므로"에서 첫 음절의 "으"는 생략되어도 아무런 혼동을 야기하지 않는다. 특히 고유어에 이러한 경우는 제법 많다. 예컨대, 단어의 머리나 꼬리 부분에 2개의 자음이 연속적으로 등장하면 첫 자음 다음에 "으"를 추가하여 읽도록 규칙을 정함으로써 "으"를 생략할 수 있다.

3. 모아쓰기는 우리의 언어습관을 음절단위로 고정시킨다.
긴 단어를 줄일 때 생략은 매우 편리한 수단이다. 여러 단어의 첫 글자만 골라 만든 두음단어가 영어에서 매우 즐겨 사용되는 것은 생략의 매력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도 두음단어를 만드는데 영어에서와는 달리 음절단위로 취사선택한다. 예컨대 "전국경제인연합회"를 줄여 "전경련"이라 한다. 음절을 깨뜨려서 일부만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언어습관이 아니다. 앞의 예에서, 세 음절 중 적절한 자소만을 선택하여 "적련"이나 "저견"이나 "저결"라고 하지 않는다(첫 자소만 이용한 조합은 입력이 되지 않아 예시에서 빠짐). 음절단위의 생략은 자소단위의 생략에 비하여 유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생략이 아예 불가능하게 하는 경우도 생기게 한다. 예컨대 "배오개"라는 지명은 "배고개"에서 중간 음절에 있는 "기역"이 생략된 예인데, 음절단위로만 생략이 허락된다면 "배개"는 너무 심하기 때문에 생략이 포기될 수 있다. 우리의 고유어에는 자소단위의 생략으로 새 단어가 만들어지는 예가 있는데 (예; 새갓> 새앗> 시앗; 첩) 상기한 음절단위의 사고방식은 이러한 사례의 발생빈도를 줄인다고 본다. 음절단위의 사고방식이 음절단위의 표기방식에서 나온 습관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자소단위 생략의 습관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어렵게 할 수 있다.

4. 모아쓰기는 문자생활에서 한자어가 선호되게 할 수 있다.
모아쓰기에서는 "아", "가" "각" 이 모두 같은 길이의 공간을 차지한다. 풀어쓰기에서는 각각 1개, 2개, 3개의 자소가 필요한 음절들이다. 한자표기를 배제하고 있는 요즘에도, 특히 신문 같은 데에서, 음절이 적은 한자어가 선호되는 것은 지면의 효율을 높이기 위함이다.
풀어쓰기에서는 단어의 길이가 음절수에 비례하지 않고 자소의 수에 비례하기 때문에 종성이나 초성이 없는 단어가 길이 면에서 경쟁력을 갖는다. 받침이 많은 한자어에 비해 받침이 적은 고유어가 표기 길이의 경쟁에서 약점을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다. 그리고 새 어휘의 생산에서 받침이 적은 음절의 단어들이 환영받을 수 있다.

5. 기타의 단점
모아쓰기는 글꼴(폰트)의 개수를 늘여 소프트웨어에 부담을 주고 있다. 한글 서체 한 벌 개발하는데 많은 돈이 든다. 폰트 파일도 커져야 하고. 모아쓰는 작업을 워드프로세서에 맡기기 때문에 소프트웨어도 복잡해지고(사실 이점은 사소한 문제). 예쁘게 쓰기 위해 쓰기 연습도 더 많이 해야 하고. 장음의 표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발음의 장단으로 어휘를 구분하는 습관을 고사시킨다. 장단의 구분은 표기가능발음의 개수를 거의 두 배로 증가시키기 때문에 이 습관을 버리는 것은 언어의 효율 면에서 매우 큰 손실이다.

<모아쓰기에 대한 우호적 주장>
모아쓰기에 장점도 있다고 한다. 모아쓰기에서는 자소의 모양뿐 아니라 자소의 위치도 정보를 주기 때문에 식별의 효율이 높다는 점이다. 알기 쉬운 예로서, "공"자를 빨리 써서 중성 "오"가 "니은"처럼 보이더라도(정확히 써도 마찬가지이지만) 그것이 모음이 올 자리에 위치하기 때문에 "니은"으로 혼동되는 일이 없다. 음절 단위로는 맞는 사례이다. 거의 유일한 장점이다.

그런데 모아쓰기의 전반적인 식별효율이 정말로 높은지는 검토의 대상이다. 풀어쓰기에 능숙한 집단과 풀어쓴 문서가 따로 없기 때문에 독서 실험을 통하여 계량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단지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우리가 독서를 할 때, 각 음절의 초성 ,중성, 종성을 모두 정확히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초보는 독서를 할 때, 한 글자 한 글자를 뜯어보지만, 좀 능숙해지면 단어 전체를 보고, 더 능숙해지면 여러 개의 단어를 한 눈에 식별한다. 그해서 급하게 읽을 때는 "할이버지"라고 쓴 것도 "할아버지"로 인식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대부분의 국민이 단어 단위로 식별할 정도의 독서실력을 갖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누구나 문서를 마냥 읽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빨리 읽으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읽는 단어가 어느 단어인지 식별할 수 있는 만큼만 노력을 기울인다. 모든 자소를 확인하려면 오히려 독서의 속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앞의 "공"자의 예에서 확인한 효율이 작용할 틈이 적다. 모아쓰기는 동일한 크기의 칸 안에 음절을 표기하기 때문에(유사성은 식별의 최대 적이다.) 자소의 높낮이에 다양성을 준 풀어쓰기에 배해 오히려 단어단위의 식별성이 떨어질 수 있다. 풀어쓰기를 채택한 서구권의 독자들의 독서속도가 한국인의 독서속도보다 떨어질 이유가 없는 소지가 여기에 있다.

<결론>
우리의 독특한 (따라서 창의적인) 방식이라는 점 말고도, 꽤 익히기 쉽고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현재의 모아쓰기가 우리의 언어 습관에 눈에 잘 띄지 않는 골병을 안겨 주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풀어쓰기의 수용가능성은 별개로 하고, 풀어쓰기의 시안(글꼴을 의미함)을 고안하여 보았다.

대소문자의 구분은 필요 없지만 필기의 효율과 독서의 효율은 서로 상충하므로 필기체와 인쇄체의 구분은 필요할 것이다. 쓰기에는 획이 단순하고 예리한 꺾임이 없는 글꼴은 유리하고, 읽기에는 가급적 특징이 많은 글꼴이 유리하므로 획의 개수가 추가되고 예리한 꺾임도 활용될 수 있다.

이 페이지에서는 풀어쓰기를 위한 글꼴을 제시할 수단이 없으므로, 새 글꼴의 원칙만 제시하여 본다. (워드프로세서 조작기술을 배워 언젠가 폰트를 공급할 생각이다. 물론 공짜로. 풀어쓰기 동호인이라도 생겨 세월이 지나는 동안 풀어쓰기의 편리성이 실증되면 좋겠다.) 사실 좋은 글꼴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원칙이라고 본다. 최현배 선생님이 제시한 원칙부터 시작하자.

1. 구분하기 쉬울 것(읽는 측면)
2. 쓰기 쉬울 것
필기 효율의 문제이다. 예컨대 "쌍비읍"은 현재 8개의 획으로 이루어졌는데 p에 비해 부끄러울 정도로 비효율적인 표기이다(필자의 사족임).
3. 아름다울 것

옳은 말씀이다. 몇 가지 기준이 더 있는데, 중요한 것만으로 끝내자. 필자가 추가한 원칙은 다음과 같다.

4. 모양이 가급적 알파벳 닮지 말 것. 자존심 상한다.
5. 별도로 배우지 않아도 될 정도로 현재의 글꼴과 닮을 것.
6. 중자음, 복자음, 중모음도 하나의 글꼴로 표현할 것
그렇지 않으면, 풀어쓴 결과가 대책 없이 길어진다. 글꼴이 24개뿐이라고 해야 자랑스러울 이유가 없다. 글꼴이 24개의 원소로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충분하다.
한글의 약 50%가 종성이 있는 음절이라고 한다. 풀어쓰기 글꼴의 폭이 모아쓴 글 폭의 반이 되게 잡는다면, 종성은 풀어쓴 음절의 지면상 길이를 평균적으로 25% 증가시킨다. 반면, 모든 소리 없는 "이응"과 일부 "으"의 생략은 지면 길이를 감소시킨다(10%정도는 될 듯). 그리고 풀어쓰기 문서의 줄 간격은 약간 좁아져도 되기 때문에 풀어쓰기로 지면 소요량이 증가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소리 없는 "이응"과 "으"의 생략이 가능한 표기에서는, 지금의 두벌식 자판으로 입력하면, 컴퓨터가 복자음이나 중자음인지 아니면 단자음 두 개인지 판단하기 힘들고, 중모음인지 모음 두개인지를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입력 자판이 바뀌어야 한다. 즉, 하나의 글꼴이 하나의 글쇠에 대응되어야 한다. 소리 없는 "이응"과 일부 "으"의 생략으로 입력 타수가 줄어듦은 물론 복자음, 겹자음, 중자음이 한 번의 타자로 입력되므로 기록 효율이 크게 향상되는 것은 기대 이외의 부산물이다.

- 이 글은 디지털조선일보의 기자클럽>통달인클럽>우리말통에 실은 글을 다시 올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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