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장에 대해 수긍하는 사람이 많은 현실인데, 이를 무시하고 한자배척 내지 고유어 옹호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효과적이 아니다. 믿음과 상충하는 운동은 호응을 받기 어렵고, 언어습관의 저항을 극복할 힘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 믿음이 정말로 옳다면 그에 상충하는 운동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미 누군가가 말한 내용과 중복되는 부분이 많을 가능성을 무릅쓰고, 한자의 효용에 관한 주장의 허실을 따져본다. (우리 고유의 것에 대한 애착심은 논외로 하겠다.)
한자의 효용에 대한 위의 주장이 사실과 일치하는지는 실증적 조사연구를 통해서만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연구가 시도된 예는 없다.
타당한 실증적 조사연구를 위해서는; 한자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표본집단을 선정하되 표본오차를 감안하여 집단의 크기를 충분하게 정하여야 하고, 어휘학습의 효율성을 측정하기 위하여 일정한 기간동안 동일한 여건 하에서 실천된 어휘학습활동의 성과를 측정하고, 어휘구사능력을 지수화할 수 있는 방법론을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실험설계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한자옹호론자는 "한자를 많이 아는 사람이 구사하는 평균 단어수가 모르는 사람의 것보다 많다"는 진술을(진위를 확인한 바는 없음.) 증거논리로 제시하곤 한다. 그러나 이 진술은 증거능력이 없다. 한자를 잘 아는 사람이 평균적으로 교육수준이 높거나 어휘학습에 노력을 더 많이 들인 사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데이터(사실)에 의한 증명이 불가능할 때 즐겨 사용되는 방법은 사례제시를 통한 설명이다. 이 글에서는 사례를 통하여 한자의 효용에 대한 신념이 미신에 불과하다는 점을 폭로하고자 한다.
사례 1; "자동차"의 예 (한자 지식이 방해가 되는 사례)
보통 한자를 배우기 전에 자동차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어린이는 장난감자동차를 가지고 놀며, 자동차를 타고 학교에 다니며, 길에서는 자동차를 조심하는 동안에 자동차라는 개념에 대해 익숙해진다. 그러다가 한자를 배우면 자동차가 "스스로 움직이는 차"라는 의미로 만들어진 단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네 개의 타이어바퀴를 갖고 휘발유를 먹고 운전하면 가는 차"라는 종전의 개념을 버리고 "스스로 움직이는 차"가 자동차라고 개념을 바꾼다면 이는 한자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자동차는 결코 스스로 움직이는 차가 아니다. 사용자가 운전을 하지 않으면 꼼짝도 않는다. 운전 문제를 논외로 하면, 궤도 위를 달리는 기차나 전동차도 자동차이어야 한다. 오히려 한자의 뜻풀이를 사용하지 않은 개념이 더 실용적이다. 어린이가 진작에 한자를 알았다면 자동차라는 단어를 더 쉽게 암기하였을 리도 없다. 개념만 분명하다면 한 두 번 듣는 것으로 그 단어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어린이의 언어능력이기 때문이다. 한자 지식이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걸림돌을 제공하는 사례이다.
한자옹호론자의 변을 들어보자.
물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너무 자주 접하고 내용이 구체적이어서 한자 없이도 그 의미가 분명해지는 단어들도 많다. 그러나 이러한 단어들은 우리 어휘의 일부만을 차지한다. 수많은 추상적 학술적 기술적 용어들은 한자를 통해서만 쉽게 학습될 수 있다.
그러면 다음의 사례로 넘어가자.
사례2; 과학, 문명, 금융의 예 (한자 지식이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는 사례)
이 단어들은 일본인들이 처음 서구문명을 접하면서 서구언어의 단어를 번역하기 위하여 만든 번역어들인데, 한자의 뜻풀이만으로는 그 의미를 전혀 알 수가 없는 예들이다. 이 외에도 과학, 경제, 산업, 체제, 등등 우리에게 사용가치가 높은 많은 단어들의 의미가 개별 한자의 뜻으로부터 전혀 도출되지 않는다. 한자지식이 무용지물이 되는 사례들이다.
금융은 좀 만만해 보인다. 금융(金融)은 금이 녹는(융해(融解)) 것이라고 이해하면 그야말로 무식의 소치이다. 그러나 한자지식과는 상충되지 않는다. 반면에 현대경제에 대해 상당한 상식이 있는 사람은 자본(금金)을 융통(融通)하는 일이 금융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참에 가까운 해석이나, 한자지식만으로 도출할 수 있는 해석이 절대 아니다. 이미 융통이라는 단어의 용도를 알고 경제에 대해 사전지식이 있어야만 가능한 해석이다. 그런데 자본의 융통은 금융의 일부분일 뿐이다. 자본을 잘 활용하는 일은 더 복잡한 이론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금융이론에서 배우는 것은 거의 전부가 자본의 효율적 활용에 관한 것이다. 고도로 요약하면, 금융은 자본의 조달과 활용을 포괄하는 의미이다.(융통이 활용도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주장하면 이 설명은 불필요하다) 금융은 이래저래 한자의 뜻풀이로는 설명이 불가능하고 한 두 문단 정도의 용어해설을 필요로 하는 개념이다. 이때 금융과 융통의 "융"자가 똑같이 融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되는가?
사례 3; 인멸, 박멸, 소멸의 예(한자지식이 한자어의 구사(선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례)
한자를 알면 소멸, 박멸, 인멸, 삭제, 제거 등 한자어의 미묘한 의미차이를 쉽게 분간하여 증거소멸이라고 말하는 우를 범하지 않고 증거인멸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한자옹호론자들이 주장할 법한 이야기이다.
증거박멸, 증거제거, 해충인멸이라는 조합은 확실히 잘못된 것으로 들린다. 그러나 이는 한자의 뜻 때문이 아니고 습관에 기인하는 것이다. 인멸(湮滅)은 "흔적을 모두 없애는 것"이고, 소멸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는데 불 꺼지듯이 없어지는 소멸(消滅)과("불 끄듯이 없애는"이라고 타동의 의미로 해석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빗자루로 쓸어 없애는 소멸(掃滅), 태워 없애는 소멸(燒滅)이 그것이다. 어느 단어가 증거를 없애는 행위에 가장 적합할 이유가 없다. 한자만 보면, "증거소멸"이나 "증거제거"도 틀릴 이유가 없다. 증거인멸이 증거소멸이나 증거제거보다 적합한 이유는 단순히 법전에서 증거+인멸이라는 조합이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즉, 증거인멸이 옳은 것은 단순히 법조인들의 언어습관 때문이다. 우리가 증거인멸이라는 단어를 적소에 사용하는 것은 "인멸"에 어느 한자가 쓰였는지 알기 때문이 아니라 법조인들의 언어습관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증인을 살해함으로써 증거를 제거하는 것은 "증거인멸"죄가 아니라 "살인"죄로 취급하는 반면에 증거를 모두 없애지 못하고 일부만 없애도 "증거인멸죄"에 해당하는 사실을 아는 것은 한자를 알기 때문이 아니라 법의 집행에 대해 상식이 있기 때문이다.
해충박멸(撲滅)이 결코 해충을 파리채로 잡듯이 때려 없애는 것만이 아니라, 잡아 없애서나 약품을 뿌려 없애거나 천적을 이용하여 없애는 등 모든 제거노력을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로 쓰인 것은 맨 처음 만든 사람이 해충+박멸 조합을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해충박멸이란 단어를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해충제거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한자지식이 어떠한 안내도 하지 않는 예이다.
한자옹호론을 들어보자.
한자의 효용이 없는 단어들만 골라서 얘기하는데, 어찌 몇 개의 예를 가지고 전체를 논할 수 있는가?
그들이 한자의 효용을 증명하는 사례로서 무엇을 제시할지 모르기 때문에 여기서는 단어 건별로 반론을 미리 제시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다.
한자를 아는 사람은 이미 그 뜻을 알고 있는 한자어에 대해서는 한자를 알기 때문에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적인 판단이 단순히 착각일 가능성이 높다. (많은 수고를 들여 배운 한자에 대한 기대심리일 수도 있다.) 많은 단어에 대해 사전 지식이 있는 사람은 새 단어의 의미에 대해 추측하는 능력이 발달되는데 이는 어느 언어권에서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반드시 한자지식에 힘입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한자지식의 효용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어떠한 개념에 대응하는 한자어를 만들 때, 우리는 한자의 다양한 표현력에도 불구하고 표현대상 개념을 정확히 묘사하는 단어를 만들 수는 없다. 한자가 그렇게 완전한 것은 아니다. 특성의 일부만을 묘사하거나 상징화하는 단어를 만들뿐이다. 정확한 개념은 단어전체의 의미를 별도로 배워야 알 수 있는데, 이 개념은 한자의 글자풀이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거나 엉뚱하기 때문에 한자지식이 오히려 혼돈을 야기할 수 있다. 그래서, 처음 보는 한자어의 의미를 구성한자로부터 확정하려는 시도는 항상 위험한 것이다.
(개별 구성요소의 의미가 그대로 유지되는 합성어는 예외이다. 예컨대, 회전+율, 인원+수 등과 같은 단어는 한자어의 효율을 보여주는 예인데, 회전과 인원이라는 말의 의미를 안다면 회전율이나 인원수의 의미는 한자 없이도 이해할 수 있다.)
언제나 단어 전체의 정확한 뜻은 별도의 설명으로만 전달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 단어에 대해 정확한 설명을 들으면 그 구성한자를 몰라도 단어의 의미를 암기할 수 있다. 한자 지식이 이 암기의 효율을 향상시킨다는 증거가 없다.
그리고 사실은 어느 단어의 (사전에 나타나는) 의미를 암기하는 것만으로는 그 단어를 정확하게 구사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우리가 영작을 할 때 겪는 애로의 주요 원인이다.) 한 단어가 여러 가지 의미나 어감을 가지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비슷한 개념을 나타내는 단어가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 어떤 단어가 적당한지는 오랜 언어생활을 통하여 다양한 활용사례에 대해 경험한 것을 기억해 냄으로서만 판단할 수 있다. 이런 경우 각 단어에 포함된 한자가 보내주는 신호는 너무 희미하고 무의미하다.
한자옹호론자의 변을 한번만 더 들어보자.
그래도 한자지식이 국어학습에 부정적 효과를 미친다는 증거는 없다. 반면에, 우리말이 한자로 표기하여야만 쉽게 의미가 전달되는 단어를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자를 배움으로서 의사전달의 효율을 높일 수 있다. 그리고 상용한자 1800자 정도를 배우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냐.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한자를 사용하면서도 잘만 꾸려가고 있는데.
일본의 한자겸용은 우리의 한자겸용에 대해 어떠한 타당성도 제공하지 못한다. 마치 영어의 철자법이 복잡하다고 우리의 맞춤법이 더 복잡해도 상관없다는 주장과 같다. 타국의 어떠한 사례도 효율성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전반적인 시각에서 한자사용이 우리말의 언어효율을 향상시키는가 아니면 저해하는가하는 점이다.
현재 국어의 어휘를 고려하면, 독자가 한자에 익숙하고 해독속도가 빠를 경우, 한자의 표기는 표현의 길이를 줄여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독자의 한자 지식은 많은 비용을 부담하고 얻어지는 것이다. 1800자의 한자를 간신히 분간할 수 있게 되는 데까지 상당한 학습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더구나 한글을 읽는 것과 같이 빠른 속도로 한자를 분간하려면 추가적인 독해연습이 필요하다. 이 연습이 충분해 질 때까지는 한자가 사용된 문서의 독서 효율은 낮은 것이다. 한자를 잊지 않으려면 자주 사용하여야 하는데 획이 많은 한자의 필기는 한글의 필기에 비하여 시간이 훨씬 더 많이 소요된다. 컴퓨터로 문서 편집할 경우에도 일단 한글로 입력한 후 한자전환을 위하여 별도의 조작을 하여야 한다. 한자사용의 효율은 이러한 비용을 모두 공제하여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효과와 비용의 분석을 계량적으로 비교한 글을 내놓지 못하여 유감이다.)
그리고 상용한자를 선정한 기준이 제공되지 않아 분명하지는 않지만, (예컨대) 1800자의 한자가 충분하지 못함은 자명하다. 국민들이 문서에서 나타나는 한자의, 예컨대, 90% 내지 99%만 해독할 수 있다면 그러한 상황을 유발한 언어정책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의 기존 어휘는 한자로 표현된다면 1800자보다 훨씬 많은 한자를 알도록 강요한다. 한자교육이 이루어지던 시절에 학교생활을 한 사람들도 자주 옥편을 참조하여야 하는 현실은 한자의 어려움을 증명하는 것이다. 문자생활에 전념하는 사람만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표기체계를 갖는 것은 사회전체의 효율향상과 상충되는 것이다.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문자표기에서 한자를 완전히 추방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회에서는 한글전용정책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내버려둔 채, 학교에서만 한글전용정책을 준수하여 왔다. 결과적으로 많은 대학교졸업생이 별도로 학습하지 않은 한 신문도 제대로 읽지 못하게 되었다. 회사에서 업무처리를 제대로 하기 위하여 개별적으로 한자를 배우고 있다. 실로 무책임한 국어교육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전용정책은 지속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한글전용정책으로 국민들의 한자지식이 제한된 현실에서 한자표기의 비율이 크게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한자를 불편하게 여기는 대다수의 독자들은 저자에게 한글만 쓰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다. 이를 무시한 저서는 팔릴 수 없기 때문이다. 단어의 생산에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는 저자들이 한글만 써야한다면, 결국 새로 개발되는 단어는 한자 없이도 이해되거나 설명되기 쉽게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모든 신문에서 한자가 완전히 사라지는 시기가 언제 올지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의 불편을 무릅쓰고 한글전용정책이 지속된다면 언젠가 그러한 시절이 올 것이다. 우리가 한자 없이 표기되어도 이해하는 데에 문제가 없는 어휘를 가지게 될 때에.
- 이 글은 디지털조선일보의 기자클럽>통달인클럽>우리말통에 실은 글을 다시 올린 것입니다.